Chapter Text
연예부 기자라면 인터뷰하는 상대의 심기를 일부러 불편하게 만드는 질문을 던져 자신이 원하는 답을 얻어내는 데 능숙하다. 마치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청어의 내장을 제거하고 소금을 치는 생선 장수같았다. 무딘 식칼의 끝이 뼈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칼날이 제일 씁쓸하고 자극적인 맛의 내장을 꺼내려 시도하자, 자비스는 웃었다. 썩 기분 좋은 웃음은 아니었다.
“아뇨, 저는 같은 밴드 멤버와 자거나 사귀진 않아요. 그것만큼 밴드를 망가뜨리는 일도 없죠. 저한텐 이미 좋은 여자 친구가 있어요. 사실 우리 밴드에 애인이 없는 사람은 어린 마크밖에 없죠. 그리고 장담하건대, 곧 끝내주는 애인이 생길 겁니다.”
기자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질문했다. 그럴수록 생선 살만 더 뭉그러질 뿐이다.
“하지만 당신은 러셀과 오랫동안 만나왔잖아요? 그녀와 한 번도, 그런 경험은 없었나요? 그게 당신이 쓰는 가사에 영향을 줬을 가능성도 있고-”
“맙소사! 러셀은 두 아이의 엄마예요. 가정이 있다고요. 우린 그저 친구고 나는 그 관계를 절대 망가뜨리고 싶지 않습니다. 밴드에 여자들이 있으면 반드시 스캔들이 난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좀 여성 혐오적이네요, 그렇지 않나요? 당신 말대로라면 지금 회사에서 일하는 모든 나이 든 여성분들이 과거엔 다들 한 번쯤 동료들과 불륜을 겪었다는 소리가 되는데, 창작과 현실은 구분할 줄 아셔야죠. 제가 어릴 때 그걸 구분하는 법을 몰라 창문에서 떨어진 적이 있었답니다. 두 번은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죠. 골반뼈가 깨져 육 개월은 더 휠체어 신세를 져야 했다니깐요.”
기자는 여자였다. 교활하고 약삭빠른, 하수구에 사는 쥐새끼처럼 생긴 얼굴이었다. 그녀는 자비스의 패를 보자 잠시 물러났다. 그러면서도 절대 사과는 하지 않고 휠체어 사건으로 이야기의 물꼬를 틔웠다. 차라리 그편이 편했다. 이른 아침인데도 공기가 답답했다. 힐튼 호텔 로비의 소파 등받이에 머리를 뉘고 다리를 쭉 뻗자, 감은 눈 너머로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내일 아침 Q 매거진의 표지로 나올 사진이었다. 아니면 그의 몸이 소파와 분리된 채 기사 옆 여백에 길게 들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검은 볼드체로 강조한 글씨와 함께 실릴지도 모른다. 맙소사! Good God, 러셀은 두 아이의 엄마예요. Russell is a mother of two adorable kids.
언론과의 줄다리기는 이런 점에서 까다로웠다. 자신이 무심코 한 말이 전혀 다른 맥락으로 편집되고, 그 기사를 보고 다른 기자가 이상한 질문을 하는 식의 연쇄적인 골칫거리를 낳았다. 펄프가 글래스톤베리 페스티벌 헤드라이너를 차지하고 어워드에서 상을 휩쓸자, 단독 인터뷰와 방송이 많아졌다. 러셀은 그때마다 선글라스를 쓰고 고집스레 입을 꾹 다물었다. 그렇지 않으면 꼭 필요한 말만 했다. 가끔은 악의적으로 단답만 남발할 때도 있었다. 그래. 아니. 아마도.
딱딱하게 떨어지는 답에서 이야기가 더 나아가질 않았다. 기자들은 침묵을 이기지 못해 인터뷰를 더 진행하길 포기했고, 골목에서 담배를 피며 욕했다.
“자기가 무슨 루 리드인줄 알아. 기타도 더럽게 못 치는 주제에.”
기시감이 들었다. 저런 말을 예전에 들어본 적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까마득한 과거의 일이었다. 데이빗 힌클러. 마이클 파라모어, 그리고 키보디스트의 이름이… 글리라는 별명밖에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들 모두 학교에서 만나 스쿨 밴드로 펄프를 했었다. 그들은 모두 엘비스 코스텔로에게 한참 빠져있었고 죄다 복슬거리는 펌을 했다. 밑을 짧게 다듬고 머리를 올려 왁스로 고정했었다. 이제 사람들은 엘비스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첫 앨범을 내고 난 뒤에야 알았다. 데이빗과 마이클은 처음에 러셀이 밴드에 들어오겠다고 했을 때 반색하며 좋아했다. 그들에게 러셀은 그저 자비스와 인터뷰를 했던 특이한 여자였다. 그녀는 밴드를 하겠답시고 아직 대학에 들어가지도 못한 그들과 다르게 경영학 학위를 따기 위해 공부했고, 진짜 밴드 경험도 있었다.
러셀은 자비스보다 두 살이 더 많다. 지금도 그랬지만 어렸을 땐 더 작고 말랐었다. 흰 티에 넉넉한 청바지를 입고 휘적휘적 걸어가는 걸음걸이가 특이했다. 머리는 항상 짧게 잘랐다. 덕분에 그냥 시골뜨기로는 보이지 않았다. 여자애의 머리를 그렇게 잘라주는 곳이 셰필드에는 당연히 없었지만 바스엔 있었던 것 같았다. 은은한 밀랍 빛 가르마를 따라 머리카락이 언제나 가지런히 누워있었다. 어두운 곳에 있으면 까마귀 날개 같은 흑발로 보였고, 강한 햇빛 아래 있으면 짙은 갈색으로 보였다. 눈동자 색은 깨끗이 닦은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하늘빛처럼 연약하고 창백했는데, 언제나 눈썹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마음에 드는 상대가 있으면 더 무섭게 바라봤다. 매부리코에 사나운 눈매와 높은 광대뼈가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아우라를 만들었다. 기타를 연주하고 있으면 긴 앞머리가 중력 때문에 자주 흘러내렸다. 무언가에 열중한 나머지 얼굴 한쪽이 가려지면 부드러운 인상의 얼굴이었다. 연습실에서 그렇게 눈을 밑으로 내리깔고 있는 러셀을 지켜보는 건 자비스의 즐거움 중 하나였다.
러셀은 무명 밴드의 공연 리뷰가 있는 팬진을 쓰고 있었다. 러셀과 함께 한 인터뷰는 그가 펄프의 보컬로서 참여했던 최초의 인터뷰였다. 러셀은 횡설수설하는 자비스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면서도 재치 있는 질문과 답을 내놓았다. 어쩔 땐 예상치 못하게 가혹한 평가를 내놓으면서도 놀랍도록 다정했고, 솔직했다. 그녀는 자신의 공연이 좋았다고 말했다.
“밴드는 형편없었어. 하지만 너는 무대를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지.”
호감을 사려고 던지는 말도 아니었고 그를 떠보는 말도 아니었다. 보고서를 쓰듯 건조했다.
이미 성년을 지난 나이였던 러셀에게는 으레 사춘기를 지난 여자가 가지고 있는 매끄러운 허벅지 둔덕의 선이라던가, 골반을 타고 둥글게 내려가는 실루엣이 없었다. 납작한 가슴과 작은 흉통은 미성숙한 소년에 가까웠다. 자비스는 비쩍 마른데 키는 껑충하게 컸던 자기 몸과 러셀을 은밀하게 비교하며 동질감을 느꼈다. 다 자라지 못한 가냘픈 몸에서 이상한 카리스마가 흘러나오는 것도 러셀이 특별한 이유 중 하나였다. 성적인 긴장감이 적었다. 보통 이성을 앞에 뒀을 때 느낌과는 완전히 달랐다. 러셀은 마스카라를 꼼꼼히 바르고 달에 한 번씩 애인을 갈아 치우는 여학교 학생들과 잘 어울리지 못한 것 같았다. 그녀는 돌려 말하는 법을 몰랐고, 옆 학교의 농구팀 주장이 얼마나 잘생긴 지엔 관심이 없었다. 러셀 자신도 제 입으로 만약 자신이 공부를 못했고 선생들이 저를 좋아하지 않았다면 분명 제일 더러운 화장실 변기에 제 가방이 처박혔을 거라고 수긍했다. 또래 집단에 섞이지 못하는 모습도 자비스와 같았다. 지금도 러셀을 생각하면 아랫배가 울린다기보단 가슴 속에서 따뜻한 물결이 퍼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예측할 수 없었고 무례했으며, 예민하고 솔직했다. 그렇기 때문에 함께 있으면 끊임없이 빈정거리는 여자 형제와 앉아 있는 것 같았다. 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밴드를 같이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런 식의 상호 존중 때문이었다. 혹은 야릇한 분위기를 잡지 않으려는 쌍방의 노력에 있었다.
그게 다른 사람들에겐 잘 와닿지 않았던 것 같다. 아마 그들에게 제일 중요했던 건 러셀이 여자라는 사실이었겠지. 데이비는 제일 먼저 연습실에 도착해 기타를 치고 있던 러셀을 힐끗거렸다. 그녀는 머리를 푹 숙이고 앞으로 쏟아진 검고 윤기 나는 머리카락을 치울 생각도 못 한 채 연주에 열중하고 있었다. 데이빗은 연습실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창문 너머로 그녀를 지켜봤다. 바스의 대학에 다니고 있던 러셀은 얼굴에 여드름 흉터가 있고 셰필드를 벗어나지 못한 남자애들과는 아예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 같았다. 그는 터덜터덜 복도를 걸어오는 자비스를 향해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야, 너 쟤랑 잤지?”
“뭐?”
“러셀 시니어, 쟤랑 잔 거지? 어떻게 했냐?”
“무슨 개소리야. 쟤 남자 친구 있어.”
그때 자비스는 남자들 특유의 허세 섞인 희롱에 얼굴을 붉힐 정도로 순진했다.
“이상하네, 안 잤는데 여기 들어왔다고? 너 좋아하는 건가?”
“그냥… 우리 음악이 순수하게 좋아서 여기 들어왔다고는 생각 안 해?”
“아니, 우리가 그 정도였다면 이미 나한테도 여친이 생겼겠지. 근데 아니잖아.”
자조적인 말투가 거슬렸다. 데이빗은 펄프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은 게 분명했다. 잘 되면 여자들을 꼬실 수 있으니 좋고, 아니면 언제든 그만두고 대학을 갈 수 있다는 식이었다. 밴드를 시작하면 여자애들에게 인기가 많아질 거란 착각은 자비스도 피해 갈 수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은 소년들을 찾는 게 더 어려울 것이다. 연습실을 구하고 앨범을 내는 데 얼마나 많은 돈과 시간이 드는지 깨닫기 전에는 모두가 싸구려 설탕과자같은 꿈을 꾼다. 자신이 비틀즈나 스톤즈처럼 되서, 디비전 스트리트를 걸어 다닐 때마다 팬들이 소리를 지르며 쫓아오고, 월세를 내는 삶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궁전 같은 집을 갖고, 전용 운전기사를 데리고 다니는 그런 상상… 밴드를 시작하자 반짝거리는 상상이 일 년도 되지 않아 빠르게 박살 났다. 러셀을 향한 그들의 어림짐작도 산산조각이 났다. 자신의 의도를 숨기지 않는 사람이었고, 그게 모두가 좋게 좋게 넘어가는 방향인 적은 거의 없었다. 첫 연습을 시작하자마자 러셀은 까다롭게 굴었다. 데이비의 표현대로라면, 지나치게 건방지고 오만하게 굴었다. 대학에서 밴드를 했다는 게 그들의 음악을 깎아내릴 핑계는 되지 못한다고. 러셀은 밴드가 새로 만들기 시작한 신곡의 리프를 듣더니, 특유의 단단한 말투로 내뱉었다.
“이건 쓰레기야. 꼭 그렇게 멜로디가 단조로워야 해?”
데이빗과 마이클, 글리는 멍청한 표정으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러셀은 가방 안에서 카세트테이프 한 무더기가 담긴 케이스를 꺼냈다. 두꺼운 네임펜으로 라벨에 하나하나 이름을 적어놓았다. 글씨체가 둥글둥글하니 귀여웠다. 연습실 구석에 박혀있던 라디오에서 그동안 들어보지 못했던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발음도 어려운 동유럽 쪽의 밴드라고 했다. 다른 밴드들도 많았고, 장르는 다양했다, 글램락, 펑크, 디스코, 클래식. 그것 말고도 뭐라고 특정하기도 쉽지 않은, 나레이션이 하염없이 길게 늘어지거나 불쾌한 채찍 소리 같은 음악들도 있었다.
“이건 자동차 타이어를 길게 잘라 벽에 내리치며 리듬을 만든 거야.”
“신시사이저를 좀 더 과감하게 써야 해, 마치 성당의 오르간처럼. 그 대신 우리는 전자 오르간인 거지.”
러셀은 곡 중간중간마다 지식을 뽐내는 말투로 말을 늘어놨고, 자비스는 모두 흥미롭게 경청했으나 나머지 밴드 멤버들의 눈이 가늘어졌다. 리허설의 분위기가 엉망이었다. 데이빗이 철제로 된 연습실 문을 발로 쾅 차고 나갔다. 글리가 대놓고 한숨을 쉬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연습실에는 자비스와 러셀만이 남게 되었다. 러셀은 신경 쓰지 않았다. 제대로 인생을 걸 게 아니면 일찍 나가는 게 오히려 도와주는 거라고. 그녀는 딱 잘라 말했다.
고등학교의 마지막 여름방학이었고, 새하얀 햇빛이 눈을 찌를 듯 아팠다. 낡은 선풍기가 털털거리며 돌아갔다. 방학 동안 그들이 정한 연습일은 주 5일이었다. (표준 스케쥴이야. 러셀은 무표정하게 말했다) 나머지 휴일에 러셀은 LP판 여러 장을 들고 자비스의 집에 찾아갔다. 자비스의 방에서 그녀가 제일 아끼는 앨범을 틀었다. 러셀은 자비스가 레너드 코헨을 틀면 고개를 저었다.
“코헨은 그렇게 좋아하는 편이 아냐. 너무 청승맞아.”
자비스의 방은 버리지 못한 잡동사니들로 어지러웠다. 왜 64년도 페퍼민트 껌이 든 틴케이스를 아직도 가지고 있는건지 러셀은 이해하지 못했다. 침대 헤드엔 머그컵이 올라와 있었고, 누런 바탕의 자잘한 꽃무늬 벽엔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바나나 포스터와 제인 폰다가 붙어있었다. 그들은 북클릿을 나눠 읽었다. 개중엔 프랑스어로만 적힌 것도 있어서 사전을 뒤적여야 했다. 러셀이 자비스의 침대 위에 올라갔고, 다리를 꼰 채 이름 모를 곡들을 흥얼거렸다. 자비스는 침대 프레임에 등을 기대고 기타를 든 채 아무거나 되는대로 연주했다. 개중에 좋은 게 있으면 자비스의 좁은 어깨 위로 작은 손이 덥석 올라왔다.
잠깐만, 거기서 A가 아니라 D로 바꿔봐.
러셀이 남자 친구 집에 돌아가고 나면-그녀는 셰필드에 있을 땐 거기서 산다고 말했다- 자비스는 제 방으로 올라갔다. 그는 러셀이 누운 흔적이 그대로 있는 자리, 린넨으로 만든 얇은 여름 이불이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고 구겨진 시트를 가만히 보다가 그 위에 누웠다. 코끝에 달콤한 바닐라와 톡 쏘는 스파이스가 맴돌았다. 그는 야광 별 스티커가 붙은 천장을 쳐다봤다.
여름 방학이 끝나고 고등학교의 마지막 학기가 시작되었다. 러셀은 바스의 기숙사로 돌아갔고, 자비스는 더 이상 학교에 가지 않았다. 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에 더 가까웠다.
주변의 친구들 모두가 대학에 가거나, 집안의 사업을 물려받거나, 군대에 갔다. 오로지 그만이 아직도 어린애처럼 허황된 상상 속 세계에 갇힌 것 같았다. 주근깨가 난 얼굴을 큰 안경으로 가린 쓸모없는 소년이었다. 실패작이었다. ‘넌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단다.’ 어렸을 적 봤던 셰필드의 우주 도시 프로젝트 포스터 안 금발의 우주비행사는 자비스에게 그렇게 속삭였고, 자비스는 그 말을 진심으로 믿었다.
가능성이 무한하다는 말은 결국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다는 말이었는데, 그는 19살이었다. 우주는 기회로 넘쳐나는 지옥이었다. 이미 그보다 어릴 때 시작한 밴드가 Top of the pops에 나왔다. 학교를 가지 않으니 락커에 처박힐 일도 없었고 지루한 수학 숙제를 해야 할 일도 없었다. 시간이 남아 돌았다. 침대에 누워 러셀이 주고 간 LP판을 틀고 이미 다섯번은 읽은 북클릿을 뒤적거렸다. 아니면 러셀이 추천한 영화와 소설을 봤다. 어느 날은 루틀랜드 로드를 따라 파크우드 스프링스까지 걸어가 수풀이 무성하게 난 산길을 헉헉대며 올라갔다. 선선해진 바람과 따스한 햇빛이 그의 피부를 간질였다. 땀이 마르니 시원했다. 주변에 날벌레와 모기가 날아다녔지만, 폐를 가득 채우는 수풀의 향긋한 냄새와 흙의 묵직하고 살짝 구릿거리는 냄새가 좋았다.
평일의 산엔 사람이 없었다. 주말이라면 산 밑에 있던 공원 중턱에 누워있을 약쟁이들도 사라졌었다. 정상까지 오르면 셰필드가 한눈에 다 보였다. 빽빽한 건물과 그가 다니던 학교, 좌우로 마을을 관통하는 강, 폐공장들, 펄프가 처음으로 공연한 리밋까지 다. 자비스는 거세게 뛰는 심장을 느끼며 자신이 평생 살았던 고향이 얼마나 작은지 실감했다. 성냥갑 같은 정육면체 집들과 거리, 그 틈바구니 사이에서 자신이 얼마나 많은 일을 겪었는지, 얼마나 많은 것들을 꿈꿔왔는지. 그리고 그 모든 게 얼마나 쓸모없는 일이었는지 깨달았다. 낮은 산에 올라오면 전체가 다 보일 정도로 작은 북부의 도시 셰필드. 셰필드는 세상의 중심이 아니었다. 세상의 똥통에 더 가까웠다. 사람들은 가난했고 파게이트와 디비전 스트리트엔 실업수당을 받으러 온 이들이 정처없이 떠돌아다녔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은 이 곳을 떠나 다른 도시로 이주했다. 비전을 가진 모두가 떠나는 곳이었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이는 없었다. 늙어가는 노인들과 탈출하고 싶은 청년들이 가득한 곳이었다. 무력감이 지친 다리를 후들거리게 했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서 죽은 듯이 잠을 잤다.
자비스의 어머니는 시장 한복판에 있는 생선 가게 사장 리처드 파커에게 아들의 이야기를 털어놓자, 파커는 자비스를 그의 가게로 보내라고 말했다. 등교도 거부하고 자신만의 공상 속에 살아가는 남자애들에겐 새벽 공기와 힘든 노동이 필요하다면서. 이제 막 마흔넷 생일을 맞은 그는 돈을 벌기가 얼마나 힘든지 깨닫고 나면 자비스가 정신을 차릴 거라고 장담했다. 자비스는 반강제로 파커 씨의 생선 가게에 취직했다. 대야에 담긴 짠물은 고무장갑을 꼈는데도 뼈가 시릴 정도로 차가웠다. 어슴푸레한 새벽에 출근하면 솔로 털이 난 게딱지를 벅벅 닦고 대야를 물로 대강 씻었다. 그러고 나면 9시가 다 돼갔고, 그는 오후 세 시까지 시장에 온 손님을 응대했다. 얼음과 소금으로 범벅이 된 생선들이 든 무거운 상자는 파커 씨가 옳겼다. 자비스가 상하차를 시도하다가 생선이 바닥으로 모조리 쏟아지고 그의 허리가 나갈 뻔한 뒤로 파커 씨는 자비스가 무거운 걸 옳기게 놔두지 않았다.
“잘리지 않은 게 신기할 지경이야.”
파커 씨의 불평을 들은 자비스의 어머니는 한숨을 푹 쉬며 한탄했다. 그가 장을 보러 온 중년의 부인들에게 인기가 좋아서 다행이었다. 무뚝뚝한 파커 씨와 다르게 자비스는 농담을 잘했다.
일이 싫건 좋건 간에, 가게의 비린내가 익숙해졌다. 방의 일렉기타는 한 구석에 세워놓고 방치했다. 퇴근하고 나서 뭔가 생각해 보려고 해도, 잔뜩 피곤해 잠들고 일어나서 저녁을 먹는 게 다였다. 크리스마스가 한 달 남은 시점이었다. 자비스의 집으로 우편이 도착했다. 바스의 대학교에서 러셀이 보낸 엽서였다. 주황색 바탕에 몸을 아래로 숙인채 기괴하게 비틀리고 입을 쩍 벌리고 있는 괴물*이 그려져 있는 그림엽서였다. 다른 건 몰라도 셰필드의 담배 가게에서는 절대 팔지 않을 것 같았다. 뒤에는 짧은 글이 적혀있었다.
안녕. 이번 겨울 방학에는 앨범을 만들 준비를 하자. 드럼과 신디, 베이스를 구하면 될 거야. 열심히 연습하고 있어.
Miss you.
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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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어는 2집 녹음을 석 달 만에 하길 원했다. 말도 안 되는 일정이었지만 매니저(파이어가 붙여준 매니저였고, 녹음기처럼 음반사의 요구를 반복할 줄만 알았다)는 대학을 졸업하지도 않은 러셀의 항의가 같잖은지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 싫으면 다른 곳을 알아보라 통보했다. 미래를 알아보지 못하는 소형 음반사를 조롱하고 저주하는 건 러셀과 자비스뿐이었다. 매그너스와 맨셀은 밴드에 별 관심이 없었고, 일주일에 세번 정도만 출석하는 정도였다. 칸디다는 연습 날에 꼬박꼬박 나왔다. 러셀처럼 열정적인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자비스는 지금 가진 것에 감사하는 습관을 들였다. 신문 광고에 찾아와 준 도일 남매와 맨셀의 존재가 기적 같았다. 러셀도 작고 장난스러운 칸디다를 좋아했다. 매그너스와 맨셀보다는 확실히 더 편안해하는 것 같았다.
2월의 셰필드는 바람이 찼다. 자비스는 아르바이트도, 연습도 없는 간만의 휴일을 만끽했다. 한때 번영했지만 지금은 버려진 녹슨 철강 산업 컨테이너들 옆을 산책했다. 비바람에 풍화되고 벗겨진 갈색 표면이 흉측했다. 그 옆에는 겨우 자동차 하나가 지나갈 법한 도로와 강둑 옆으로 아무도 돌보지 않는 풀밭이 있었다. 돈강을 가로지르는 다리의 붉은 철골이 햇빛을 맞아 새하얗게 반짝거렸다. 저 멀리서 조그만 실루엣이 걸어왔다.
작은 수레를 끌고 오는 검은 형체가 점점 커지더니 부스럭거리는 점퍼와 셔츠를 껴입은 러셀 시니어로 바뀌었다. 수레 안엔 흙이 묻은 것처럼 갈색과 검은색으로 얼룩덜룩한 스티로폼들이 가득했다. 그것들은 울퉁불퉁한 도로가 주는 충격으로부터 신문지와 종이로 정성스럽게 싼 도자기를 보호하고 있었다. 러셀은 한껏 지쳐 보였다. 그녀에게 그동안 중고 도자기를 샀던 고객들이 이번에는 거래를 파기했다. 로더럼에 새롭게 생긴 마트에서 저렴한 인도네시아산 그릇들이 진열된 탓이다. 반듯한 이마가 실망으로 옅게 찌푸려졌다. 그녀는 왼손으로는 수레를 끌고 오른손으로는 아랫배를 계속 감싸고 있었다. 자비스는 조심스럽게 수레 손잡이를 뺏어 대신 끌었다. 그녀가 신경질적으로 내뱉었다.
"조심해. 발에 수레가 자꾸 채이더라, 싸구려라서 바퀴가 한 쪽으로밖에 안 움직여."
"어..."
러셀은 자비스가 제 눈치를 보는 걸 알고 저 멀리 붉게 빛나는 하늘을 바라봤다. 아직 네 시 반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나무 그림자가 사선으로 길어졌다. 그들은 걸음을 멈추고 잠깐 쉬기로 했다. 대규모 광부 파업이 길어지고 있었다. 경찰이 교통을 통제하자 오그리브와 로더럼, 힐스버러로 가는 버스의 차편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아마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았을 게 분명한, 폐차 직전의 낡아빠진 컨버티는 정비소에 갔고,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왕복 9마일을 걸어야 했다. (자비스는 속으로 그 차는 엔진을 교체해도 가망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러셀에게 굳이 말하진 않았다) 옷은 무거웠고, 겨울바람은 날카롭게 불었다. 그녀가 진이 완전히 빠져 기진맥진한 것도 당연했다.
자비스는 강둑의 누런색 수풀들을 깔고 앉은 러셀의 옆에 엉거주춤 앉았다. 그들은 한동안 말없이 강물을 바라봤다. 오염수가 유출된 것인지, 이상한 기름 같은 게 둥둥 떠 있었다. 황갈빛과 녹빛이 섞인 물은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흐릿하고 더러웠지만, 수면 위를 수놓는 우윳빛 유리 파편 같은 빛들이 물결의 움직임에 맞춰 춤을 추는 모습이 눈부셨다. 돈강은 왼쪽으로는 페니 스톤, 오른쪽으로는 로더럼과 돈커스터를 넘어 스테인포스 너머로도 가는 셰필드에서 제일 긴 강이었다. 거창한 수식어에 비해 강의 유속은 그리 거세지 않았다. 자갈들 옆에는 말라비틀어진 세이지브러시 덤불 사이로 굳세게 자라는 쐐기풀들이 즐비했다. 공기는 싸늘했지만, 자비스는 두꺼운 코트와 셔츠를 겹겹이 껴입어서 약간 땀이 났다.
"있잖아, 내가 열다섯살때..."
자비스가 먼저 시작했다. 그들의 대화는 대부분 그랬다.
"이 강에 고무보트를 띄우고 모험을 한 적 있어. 외삼촌이 빌려준 고무보트였는데, 알지? 바다에 가면 있는 주황색 보트. 그게 꽤 컸어, 같이 놀던 여자애랑 그때 거기에 타서 8마일 정도 항해를 했지. 로더럼까지 나무 판때기 같은 걸로 강바닥을 저어서 나아갔어. 양옆에 공장들이 연기를 내뿜었는데 얼마나 짙었던지 하늘이 온통 뿌옇던 게 아직도 기억나. 그땐 트레버 공장이 아직 멀쩡했었던 것 같은데, 아무튼 마리화나를 피우던 집시들이 우리에게 돌을 던져댔고, 강둑에 서서 물고기를 잡겠다고 공기총을 쏴대던 남자도 있었지. 막 소리를 질렀어. '이거나 먹어라, 이 개자식들아!' 지금 생각해 보면 뭐가 그렇게 화가 났었는지 모르겠지만, 완전히 <지옥의 묵시록> 같은 풍경이었어. 아마 그게 내가 살면서 해본 제일 과감한 모험이었을 거야."
"밴드를 시작한 걸 빼고 말이지."
러셀이 조용히 말했다. 지친 눈가에 희미하게 미소가 감돌았다.
"그래, 이것도 언젠가 가사로 쓰면 좋을 것 같아서 누구한테도 말 안 하고 아껴두고 있었어."
얇은 입술에서 한숨 같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제는 상체를 세울 힘도 없는지 러셀이 뒤로 벌러덩 누웠다. 자비스는 그가 러셀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괜한 이야기를 꺼낸 건 아닌지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럼 나도 비밀 하나 얘기해 줄게." 러셀이 말했다.
"나 임신했어."
마치 어제 먹은 프렌치토스트 이야기를 하듯 일상적인 톤이었다. 유순하다고 느낄 정도로 나긋한 목소리라서 농담 같지도 않았다. 러셀을 안 지 2년이 채 안 됐지만, 그녀는 우스갯소리를 할 때마다 목소리를 딱딱하게 굳혀서 착각할 수가 없었다.
"제이미랑 아예 같이 살기로 했어, 대학도, 3년제라서 이제 곧 졸업이고."
"결혼하는 거야?"
"바보 같은 소리를. 우린 교회에서 결혼식 할 만큼 부를 하객도 없어, 돈도 없고."
너는 교회도 안 가면서, 애를 낳을 생각을 하고, 네가 더 바보 같아. 자비스는 무심코 그리 말하려던 것을 참았다.
"임신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은 했어, 근데 배가 부르면 라이브도 못 하고, 인터뷰도 어려울 수도 있으니까. 녹음은 어떻게 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내가 그러니까 제이미가 당연히 밴드는 그만두는 거 아니냐고 하더라."
쐐기풀이 그의 손등을 긁었다. 많이 따갑진 않았지만, 숨이 잠깐 멈췄다.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익숙한 절망감이 일어나고 있었다. 언제든 떠날 수 있고 떠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드는, 찐득거리는 타르 같은 절망감. 자비스는 반쯤 감긴 러셀의 눈을 바라봤다.
"담배를 못 피워서 머리가 아파. 이럴 줄 알았으면 몰랐을 때 더 많이 피워둘 걸 그랬다."
"러스, 우린 기다릴 수 있어. 라이브 하면 되지, 짧게라도. 공연장에 아무도 담배 못 피게 할게. 팻말 같은 거라도 걸어놓자. <임산부 있음. 흡연은 밖에서> 이렇게, 인터뷰는 서면으로 하면 되지. 네가 그랬잖아. 인생을 걸어야 한다고, 계속 해야 한다고, 금방 결과가 나오지 않아도 어쨌든 뭐라도 해야 한다고..."
추운 저녁이 다가오자, 아침엔 그렇게 흔하게 들리던 새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적막함이 낡은 다리와 버려진 강둑을 지배하다 못해 러셀도 지배하게 된 것 같았다. 뻣뻣한 잡초들이 목뒤를 찌르는 게 아프지도 않은지 그녀는 계속 누워있었다. 카라에 털이 달린 청록색 점퍼가 옆으로 벌어지며 좁은 상체를 드러냈다. 그 안에 입은 체크 셔츠 안에 조밀하게 짜인 다홍색 니트가 있었고, 얼마나 딱 붙었는지 호흡을 따라 몸이 움직이는 실루엣이 다 보였다. 그리고 툭 튀어나온 유두와 희미한 가슴의 실루엣도.
"만져볼래?"
러셀이 배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침울한 분위기를 상쇄시킬 정도로 부드러웠다.
"뭐?"
"제이미도 그렇고, 모두가 내가 임신했다는 걸 알자마자 내 배를 만져보고 싶어 하더라. 바보들, 아직 세포 상태에 불과해서 심장 소리 같은 건 안 들릴 텐데."
"어, 그, 네가 불편하다면... 하면 안 되는거 아냐? 스트레스 받는 게... 좋지 않다던데."
"만지기 전에 손을 좀 데워. 사람들이 손이 차가운 채로 만지니까 알코올로 문지르는 것 같고, 소름 돋아."
길어지는 말이 그녀 나름의 미안함을 표현하는 방식이란 걸 알아 자비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몸을 더 가까이 붙이자 러셀은 자비스 쪽으로 고개를 떨궜다. 마치 반수면 마취가 된 채로 산부인과 침대에 누운 것처럼 멍한 눈이었다. 어두운 녹색 눈과 색유리 같은 하늘색 눈이 마주쳤다. 러셀의 표정은 언뜻 보면 무표정했지만, 그녀는 용서를 구하는 듯 한 번 눈을 깜빡였다. 자비스는 허물어진 서로의 거리감을 저주했고, 러셀이 항상 쓰던 우드러프 향수의 달콤하면서 쌉싸름한 냄새를 저주했다. 손바닥이 자꾸 미끈거렸다. 바지에 아무리 여러 번 닦아도 땀이 계속 났다. 러셀은 차분하고 여유 있게 기다려줬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배 위로 자비스의 손이 올라갔다. 그는 숨을 쉴 때마다 양옆으로 벌어졌다 다시 닫히는 갈비뼈와 이어진 윗배 사이의 이격을 느꼈다. 러셀의 몸은 그리 따뜻하지 않아서 시체 직전의 몸을 만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자비스는 이 얇은 니트를 벗기면 흰 복숭아처럼 창백한 살결이 있는 걸 알았다. 눈을 굳이 감지 않아도 그 모습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 큰 손바닥 아래에는 심장에서 시작한 박동이 천천히 흘렀다. 좀 과장을 한다면 장기가 느껴질 정도로 마른 몸이었지만, 이제는 몸이 새로운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지방을 끌어모으고 있다는 신호가 둥근 윗배를 지나 말랑한 아랫배에서 느껴졌다. 여자를 처음 만져보는 게 아니었지만, 짜릿한 전기가 손에서 시작해 발끝까지 흐르는 것 같았다.
"아직 아무것도 안 느껴지지? 이제 커지면 자궁이 위장을 누른다고 하더라."
자비스는 침묵했다. 얘기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소화불량을 달고 살 거고, 다리 사이에서 계속 양수가 흘러나오고, 가슴은 커질 거고, 못생긴 임부복 원피스만 입고 살게 되겠지... 상상이 안 되네, 하. 내가 130파운드**를 넘을 수 있다니."
공기가 손등을 할퀴는 듯 차가웠다. 러셀의 푸른 눈 안에 노을로 붉어진 하늘이 비쳤다. 자비스는 러셀의 말 가운데 한 가지는 동의할 수 있었다. 가슴이 커지고, 부푼 배를 감싸고 다리가 퉁퉁 부어서 뒤뚱거리며 셰필드를 걷는 러셀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러셀은 일단 앨범 발매까지는 괜찮을 거라 말했다. 8월과 9월에는 확실히 밴드를 쉬어야겠지만, 그전에는 최대한 되는 대로 해보겠다고. 돌이켜보면 그런 걱정조차 필요 없었다. 2집은 한탄스러울 정도로 실패했으니까.
자비스가 서른이 넘어가던 시점에 그날을 되돌아봤을 때, 기억은 균일하지 않았다. 결국 강렬하게 남는 건 그의 감각에 뜨겁게 화상을 입혔던 순간들뿐이었다. 손으로 만져졌던 뼈와 가죽의 굴곡, 아주 조심스럽게 누르면 부드럽게 들어갔던 아랫배, 호흡에 따라 물결처럼 움직이던 상체, 눈이 아플 정도로 반짝거리던 빛들, 머리카락 위로 개미가 올라가고 아끼던 옷에 흙이 묻었는데도 신경 쓰지 않고 무감하게 하늘을 쳐다보던 러셀의 눈, 붉고 푸른 홍채 같은 것들.
* 프란시스 베이컨, <십자가 책형을 위한 세 개의 습작>, 1944
** 130파운드는 58.9kg
